"유령 소녀," 그리고 노동자 인권에 일어난 변화

1922년, 미국의 공장 노동자 몰리 메기아(Mollie Maggia)는 경정맥 출혈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이미 그 이전 해부터 몰리의 몸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초기에는 치아가 하나씩 썩어나갔고, 결국 치과에서 발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회복되기는커녕 잇몸이 뭉그러지고 고름이 차올랐으며 결국엔 턱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엉덩이뼈가 부러져 영영 걷지 못하게 된 그녀는 얼마 안 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사망진단서에 기록된 사인은 '매독.' 그러나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몰리 매기아는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방사능의 위협은 몰리의 이후에도 계속돼 여공들이 하나씩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받는 평균 급여의 세 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던 이들은 처음엔 대체로 만족해했다. 경제적인 자립을 이뤄낸 젊은 여성들은 이전 세대에선 감히 꿈도 꿔 보지 못한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 시계 제작 시, 라듐을 섞은 것으로 표면을 칠해 특유의 광택을 살리곤 했는데, 시계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입술로 붓 끝을 뾰족하게 만들도록 지시받았다. 매번 붓이 입에 닿을 때마다 소량의 라듐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공장 간부들은 이러한 잠정적인 위험성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인했고 따라서 사태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은 라듐의 이점만 전해 듣고, 라듐이 들어간 물을 마시고 화장품과 식품에 섞기도 했다. 

라듐에 함유된 형광 물질은 당시 널리 유행해 치아 미백에 까지 쓰였다. 유독 물질을 바르고 피부에서 빛을 발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소위 "유령 소녀" 스타일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몰리의 죽음 이후 여공들은 저마다 다른 증상과 문제점을 호소하며 종국엔 몰리와 같은 운명을 걸었다. 일부 여성은 사산아를 출산하고, 만성 피로에 시달리기도 했다. 신체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처참히 파괴되었다. 피부에 구멍이 뚫리고, 뼈는 가루가 되고, 종양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라듐은 외부적인 접촉만으로도 체세포를 파괴하는데, 당시 여성들은 그걸 먹기까지 했으니 파괴력은 엄청났을 터. 체내에 라듐이 쌓이며 증상은 악화했고 이후 회복이나 치료는 불가능했다. 

여공들이 하나씩 목숨을 잃어감에 따라, 문제는 보다 명확해졌다. 더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기 전에, 꽃다운 청춘들의 목숨을 부지하려면 회사 측이 팔 걷고 나서서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길고 긴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여공들은 라듐으로 인해 건강을 위협받고 있음을 증명하고, 이를 부인하는 파렴치한 회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악랄한 회사 측의 대응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라듐은 건강 악화 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 거짓 자료를 내세우고, 단지 라듐 하나로 인해 나타난 문제로 보기엔 증상이 너무나 다양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뻔뻔하게 몰리의 날조된 사망진단서를 들고 나와 매독으로 사망했다고 단단히 못 박았다. 

양 측이 팽팽히 맞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던 공방은 한 남성의 사망으로 인해 급격한 변환점을 맞이했다. 1925년, 해리슨 마트랜드(Harrison Martland)는 여공들이 앓던 증상과 라듐의 관련성을 밝혀냈다. 무덤에서 파낸 시신을 살펴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시신은 손수 빗을 들고 칠하던 시계의 광택처럼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회사의 부조리함을 더는 참지 못하고 낱낱이 폭로하기로 마음먹은 여공들은 죽기 직전 회사를 저주하는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신문들은 앞다퉈 이 사건을 중점적으로 보도했고, 라듐의 위험성과 회사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마침내 1938년, 시계 회사 운영진은 젊은 여공들의 죽음을 방치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여공들이 맞서 싸워 얻은 것은 무엇일까? 법정에서 승소한 후로 근로자의 노동 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문제점을 입증할 수 있게 되자, 회사나 공장은 근로자의 안전을 최우선 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인권은 당시 죽음을 앞두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시계 공장의 여공들에 의해 초석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유령 소녀"의 사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잊히고 있다. 아무쪼록 그분들의 공로가 널리 알려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훌륭한 본보기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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