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할머니의 보따리에서 나온 뜨거운 모정

2014년 9월, 부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구의 한 파출소에 이제 막 발령받고 업무를 시작한 박 순경은 점심 식사로 노곤해졌습니다. 데스크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때, 옆에 앉아있던 김 경사가 제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웬 할머니가 짐 보따리를 들고 시내를 배회하고 계세요." 제보자는 할머니는 같은 장소를 1시간도 넘게 헤매고 있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박 순경은 동료 경찰과 같이 순찰차에 올랐습니다. '아마 단순히 길을 잃으신 걸 거야. 금방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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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보자기로 꽁꽁 싸맨 커다란 짐을 두 개나 들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습니다. 경찰이 이름, 주소, 목적지를 물어도 할머니는 "출산한 딸이 병원에 있어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에, 박 순경은 할머니가 혹시 치매 환자가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딸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짐을 품에 꼭 안은 채 발만 동동 구르셨습니다. 박 순경이 처음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어려운 사건인 듯 보였습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박 순경은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할머니가 외출용 신발이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거로 미루어보아, 분명 근처에 사는 주민인 듯했습니다. 할머니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박 순경은 할머니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혹시 아는 분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의 가족을 찾을 때까지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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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경찰이 수소문하는 동안, 박 순경은 할머니를 파출소에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는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내려놓으시라 권했지만, 할머니는 "안 돼!"라며 한사코 짐을 받으려는 그를 저지하셨습니다. 대체 보따리 안에 뭐가 들어있었던 걸까요? 경찰은 할머니의 완강한 거부로 안을 열어보지 않고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시간 뒤, 경찰은 드디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이름, 주소, 그리고 딸이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알아낸 덕에 경찰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죠. 첫 신고 전화를 받은 뒤 자그마치 6시간이 흐른 뒤에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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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할머니와 같이 딸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던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할머니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습니다. 이어 그토록 소중히 안고 있던 보따리 두 개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바리바리 싸 온 것을 보고, 병실 안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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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한 딸을 위해 준비한 미역국, 나물 반찬, 쌀밥, 그리고 포근한 이불이었습니다.

박 순경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 노인이, 산고를 겪은 딸 미역국 한 술이라도 뜨게 해주고 싶다는 일념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한 보자기 속에 숨어있던 뜨거운 모정에, 박 순경의 두 눈엔 터질 듯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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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 무라."라고 수저를 내밀며 딸을 재촉하시던 할머니. 차갑게 식어버린 미역국을 숟가락으로 뜨던 딸의 뺨에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강한 모성애 앞에선, 그 무섭다는 치매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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